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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9.06 엔지니어? 8
학교 다닐 때도 몰랐지만 아직도 모르는 고체역학. ㅡㅅ-
엔지니어? 엔지니어란 무엇인가? 우리 나라 말로 바꾸면 기술자, 사전에는 기계, 전기, 토목 따위의 기술자라고 되어 있다. 기술자는 어떤 분야에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풀어 말하면 기계, 전기, 토목 따위에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걸로는 순돌이 아빠랑 뭐가 달라? 위키피디아에서 engineer로 검색해보면 좀 더 자세하게 나온다.
Engineers are concerned with developing economical and safe solutions to practical problems, by applying mathematics and scientific knowledge while considering technical constraints.엔지니어는 기술적인 제약 조건을 고려, 수학적, 과학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실제적인 문제에 경제적이고 안전한 해답을 찾는 사람이다.
이쪽이 좀 더 있어보이긴 하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개념과도 비슷한 것 같고. ㅎㅎ
위의 정의대로라면 나는 엔지니어이다. 현재 가능한 기술을 가지고 가능한한 경제적이고 안전한 배를 설계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은 아니다(가끔 비슷한 일을 할 때도 있지만). 그런 것은 과학자들이나 연구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있는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서 경제적(티코 값을 받고 그랜져를 만들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같은 티코라도 좀 더 튼튼한 티코가 되게 설계하는 것을 해볼만 하지 않은가? 유지비도 좀 덜 들면 좋잖아?)이고 안전한(바다는 매우 거친 곳이다. 땅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2주 이상을 떠다니는 일을 25년 이상 해야 된다고 생각해 보라. 가끔은 태풍을 만나기도 한다!) 배를 설계하는 일은 매우 도전적이고 매력적인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요즘 일이 재미가 없다. 그렇게 도전적이고 매력적인 일인데 왜? 같은 일을 8년째 하고 있어서?
나는 뭔가를 무턱대고 외우는 것에는 소질이 없다.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할 때에도 무턱대고 외우는 과목은 성적이 그닥 신통치 않았다. 대신 무엇인가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에는 소질이 있었다. 어떤 것의 바닥부터 파고 들어서 그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 또는 관심이 있는 것에 적용하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그런 것들을 요구하는 과목은 남들이 어렵다고 해도 성적이 좋았다.
유조선의 중앙 횡단면, 상당히 오래되고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그 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배에는 위의 도면과 같은 중앙 횡단면이 있다. 배의 한 가운데를 자른 단면을 그려놓은 도면이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저 한 장의 도면이 있으면 그 배가 어떤 종류의 배인지부터 많은 것들을 알 수가 있다. 그만큼 중요한 도면이다.
내가 예전에 6년 반 동안 하던 일은 저 한 장의 도면을 가지고 거기에 살을 붙여 배가 요구되는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일이었고, 지금 약 1년 동안 하고 있는 일은 저 도면을 설계하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좀 더 근원적인 부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할 수 있고, 그런 면에 있어서는 불만이 없다.
그래서?
처음 저런 도면을 설계한 사람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어떤 것을 바닥부터 일일이 만들어내야 했을 것이며, 선 하나를 긋는 것도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닥에 깔려 있는 수많은 수학적, 과학적인 원리에도 통달해야 함은 물론이다.
지금 상황은 많이 다르다. 우리보다 앞서 설계한 도면이 수도 없이 많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 지금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원하는 사이즈를 입력하기만 하면 내가 결정해야할 것들을 상당 부분 프로그램이 알아서 해준다. 거기에 대한 리포트도 자동으로 생성되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그 보고서를 보고 거기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검토하는 일이다. 그것을 도면으로 그리는 일을 포함해서.
물론 거기에 수학적, 과학적 원리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바탕에 깔린 모든 세세한 원리를 알지 않아도 어느 정도 수준의 도면이 나온다. 이런 것이 반복되다 보면 의문이 생긴다. 처음 그 도면의 어떤 부분을 설계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가, 그 바닥에 깔린 원리는 무엇인가, 그런 것들이 잊혀지는 것이다. 물론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왜 그렇게 했는가는 알기 힘들다. 그런 것은 우리 회사처럼 오래되고 경험이 많은 회사에서 상대적으로 이런 일에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무엇이 궁금해서 알고 싶은데, 왜 그랬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예전부터 그렇게 했으니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대로 하면 된다?
네 그렇군요. 맥 빠지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물론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 주어진 시간 안에 설계를 끝내야 하고, 그 기간이 짧다면 어쩔 수 없이 예전에 했던 설계들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전혀 새로운 설계를 한다면 주어진 시간 내에 끝내기 힘들 것이고, 그것이 이상이 없다는 것을 검증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효율을 중시하는 기업에서는 하기 힘든 일이라는 점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정말 이대로 좋은가?
종래의 FPSO, 검증된 디자인이지만 측면에서 오는 파도에는 취약하다. (사진은 신문에서)
FPSO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원유를 시추하는데 사용된다. 특성상 같은 곳에서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머무르면서 원유를 시추한다. 바다 깊은 곳에 파이프를 꽂아 원유를 뽑아 올리기 때문에 파도가 치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체적으로 이동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잦은 일은 아니기 때문에 원유를 저장할 공간을 늘리기 위해서 배가 박스처럼 되어 있어 속력이 빠른 편은 아니다.
Sevan Marine ASA에서 개발한 신개념의 FPSO, 원통형이라 어떤 방향에서 파도가 오더라도 잘 견딜 수 있다.
같은 FPSO지만 같은 곳에서 몇 년씩 머무르면서 항상 같은 자리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원통형으로 설계된 새로운 개념의 FPSO다. 몇 년에 한 번씩 이동할 때에는 별도의 선박으로 이동해야 하지만 그런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큰 단점은 아니다. 아직은 규모가 작지만 대형화에도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엔지니어에게는 물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물론 그닥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ㅡㅅ-) 실무 경험이 8년째지만 내년에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것도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서다. 하지만 엔지니어에게는 전문적인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 호기심과 창의력도 필요하다고 본다. 누군가 기존에 설계해놓은 것을 검증하는 것은 기본적인 수학적, 공학적인 지식이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문제를 경제적이고 안전하게 해결하려는데 선례가 없다면? 그런 것이 정말 엔지니어가 필요한 부분이고 그런 일을 해야 엔지니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배움에도 소홀하지 말고, 호기심도 잃지 말자. 타성에 젖는 순간 늙기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