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독일 문학의 이해'에 해당되는 글 1건
- 2009.07.10 야간운전
장생포, 500미리 크롭
따르르릉-
시계의 알람이 나를 깨웠다. 오후 5시. 요기를 하고 씻고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 잠들기 전에 마신 술의 기운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돈다. 갈증이 난다.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내가 하는 일은 야간 화물차 운전이다. 스물 일곱, 경력 4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서울에 올라와 닥치는 대로 아무런 일이나 하면서 돈을 모았다. 배운 것이 없는 내가 할 것이라곤 막일뿐이었다. 막일로 모은 돈으로 면허를 따고, 택시를 몰았다. 경력이 쌓이자 대형 면허를 딸 수 있었다. 택시를 몰면서 모아둔 돈으로 권리금을 지불하고, 화물차를 몰기 시작했다.
야간 화물차로 싣는 물건은 다양하다. 그것이 채소든, 광물이든, 혹은 시체라 해도 상관은 없다. 일하러 나가서 실려 있는 물건을 확인하고, 지정된 목적지에 지정된 시간까지 도착한 다음, 짐을 내리고 인수증에 도장이나 서명을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요구되는 것은 면허증과 머리 속에 든 지도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정된 장소에 지정된 시간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환한 대낮을 두고 야간에 애써 화물차를 몰아 화물을 나를 리 없다.
출근을 해서, 사무소에 들렀다. 허름한 간이 컨테이너 창고에는 50이 다 되어 가는 뚱뚱한 몸집의 주임이 앉아 있다.
"왔어? 오늘은 좀 바쁘니까 부지런히 해야겠어."
광태는 뭐하고 있을까.
"광태? 어디 보자. 응. 오늘은 물건 싣고 위에서 내려오게 되어 있구만."
일정을 확인하고 컨테이너를 나섰다. 화공약품이 들어 있는 드럼통을 60개 싣고 청주까지 올라가서 짐을 부리고는, 근처 공장에서 완제품을 하나 가득 실어 서울까지 올라가야 한다. 내일은 서울에서 자겠군.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익숙한 소음 속에서 각종 계기를 확인하고, 기름이 얼마나 남았나 본다. 중간에 경산이나 칠곡 쯤에서 기름을 넣어야 할 듯 싶다. 라이트를 켜고, 기어를 넣고, 핸들을 돌리며, 악셀을 밟자 거대한 화물차는 천천히 앞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일단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시내보다는 한결 여유가 있어졌다. 라디오를 틀었다. 야간 운전은 쓸쓸하다. 차도 별로 없는 뻥 뚫린 길을 말을 건넬 사람도 없이 밤새 운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주변의 풍경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졸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사는게 이런 것인가 싶다.
광태는 지금쯤 오산이나 안성을 지나고 있겠군. 광태는 나랑 동갑이며, 일도 같이 시작했다. 몸집은 작지만 야무진 녀석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나와는 달리 고향의 노모에게 송금도 하고 있다. 가끔 운전을 하다가 마주치면 손을 흔들곤 한다. 손을 흔드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사고 없이 무사히 왔다는 반가움과, 수고하라는 격려와, 끝나고 술이나 한 잔 하자는 등의 말로 하자면 길어질 내용들이 단 한 번 손을 흔들면서 전달되는 것이다.
라디오를 틀어 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차는 어느 새 영천을 지나 경산으로 가고 있다. 잠깐 기름이라도 넣으면서 담배나 한 대 피워볼까.
차는 저절로 경산 휴게소로 들어가고 있다. 차는 기름을 가득 채우고, 나는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가득 채우고 있다. 오늘은 보름달이 떴다.
다시 시동을 걸고, 차는 낮은 비명을 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잠깐의 휴식은 끝나고, 다시 쓸쓸한 길을 떠난다.
선암수변공원
"뭐해먹고 살거냐?"
술을 마시다 말고 느닷없이 광태가 묻는다. 글쎄. 별로 생각해 본 것이 없는데.
"늙어서까지 화물차나 몰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거 아니냐.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사실 날이 얼마 안남은 것 같고. 난 돈 좀 모이면 고향에 가게나 하나 낼까 싶다. 결혼해서 손자도 보여 드려야지. 평생 고생만 하고 사셨는데 가시기 전에 효도라도 좀 해야 하지 않겠냐."
아무 소리 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광태가 잔을 채워준다.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통 모르겠다. 돈을 모으는 것 같지도 않고. 야간 화물차 운전이면 그래도 꽤 짭짤한 축인데. 너도 마음 잡고 가게나 하나 내보는 건 어때? 어차피 이대로 늙어봐야 버스 운전 밖에 더하겠냐."
이대로 늙는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면서도 돈을 벌어 어쩌겠다라는 생각이 없었다. 그냥 살다보니 여기까지 흘러 왔다고나 할까. 그러나 광태의 말대로 평생 이런 일을 할 수는 없겠지. 나도 뭔가 결정을 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갑자기 차선이 좁아지고 반짝이는 불빛이 보인다. 사고가 났나보다. 경찰의 통제를 받으면서 천천히 사고 현장을 지난다. 맞은 편에서 오던 화물차가 중앙 분리대를 넘어 승용차를 깔아뭉갠 모양이다. 아마도 졸거나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승용차가 갑자기 앞으로 끼어든 것일 수도 있다. 그걸 피하려고 핸들을 꺾다가 중앙 분리대를 넘었을 수도 있다. 무거운 화물차는 쉽게 멈출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고독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독이 싫다고는 하지만 막상 누군가 옆에 있으면 불편하다. 누군가를 신경써줘야 한다는 것이, 누군가 나에게 신경을 쓴다는 것이 불편하다. 그래서 여태 혼자다. 누군가에게 다가간 적도 없고, 누군가가 다가오면 피했다. 그래서 야간 화물차 운전이 좋다. 밤새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은 난 완전히 혼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회덕 분기점을 지나 남이 분기점으로 다가가고 있다. 공단으로 들어가려면 서청주 쪽이 빠를 것이다. 나중에 나올 때는 청주 IC를 빠져나와 서울로 올라가면 된다. 그래서 서청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내고는 좌회전을 해서 국도로 접어들었다. 공단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밤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하다. 짐을 부리는 동안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구내 식당에서 야참을 먹었다. 인수증에 사인을 받고 인접한 다른 공장으로 향했다. 지게차로 짐을 싣고 출발했다. 서울까지의 시간은 빠듯할 것 같다.
서청주에서 청주까지의 길이 새로 뚫려 운전하기 편하다. 전에는 좁은 길을 지나 갔었다. 청주 IC를 빠져나와 서울 방면으로 접어들었다. 서울까지는 두 시간 남짓 걸린다. 라디오에서 조용한 음악이 나온다. 잠을 깨기 위해 라디오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다.
광태 녀석이랑은 요즘 계속 엇갈려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마침 내일이 휴일이니 내일은 얼굴을 볼 수 있겠다 싶다.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할까. 말하자면 광태 놈은 지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비슷한 존재겠지.
시간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흐르고 있다. 어느 새 차는 반포와 잠원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 시내를 거쳐 구로 공단에 짐을 내려다 주면 오늘 일은 끝이다.
담배를 피우며 피곤한 얼굴로 짐을 부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지정된 장소에 지정된 시간에 도착했다. 이젠 차를 회사 주차장에 가져다 대고 숙소에 들어가 잠을 자면 된다. 동이 트려는지 하늘 한 쪽이 파랗게 밝아온다.
잠이 깼다.
시계는 두 시가 좀 넘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은 휴일이다. 광태놈 오늘 올라올 텐데. 전화나 걸어 술이나 먹자고 해야겠다. 수화기를 들어 광태의 핸드폰 번호를 누른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일단은 늦은 점심이나 먹고 다시 걸어봐야겠다. 식당으로 가면서 휴게실을 지나는데 향내가 난다. 휴게실 문을 열고 보니 제단이 하나 차려져 있고 향이 타고 있다. 앞에는 사진이 놓여있다.
순간 잠이 확 깬다. 사진에서 웃고 있는 것은 광태였다. 나는 그렇게 하나뿐인 친구를 잃었다.
선암수변공원
"김형 왔어? 오늘은 좀 바쁠 것 같은데. 그건 웬 꽃이야?"
일정을 확인하고, 화물을 확인하고, 시동을 걸어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다가 황간을 지나 영동에 이르를 무렵에 창 밖으로 꽃을 던졌다. 오늘은 광태가 죽은지 삼 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아직도 야간 운전을 하고 있다. 무거운 화물차는 쉽게 멈출 수가 없다.